장 그르니에는 고양이 예찬론자에 틀림없다.

p.58

그렇지만 고양이는 존재한다. 라는 문구에서부터 보면 알 수 있다.


도대체가 장그르니에의 일상적인 삶을 읽으면서도 느낀 점이지만, 이 작가는

19c 말에 태어나서 1971년 3월 5일에 죽었다는데에도, 왜이렇게 21c가 16년이나 지난 이 시점에서도 왜이렇게 시대의 괴리를 느낄 수 없겠는지 모르겠다.


p.61

<경박한> 주제에 대해여 <진지하게> 연구하는 것 만큼이나 내 맘에 드는 일은 없었다.

라고 한다. 지금 내가 딱히 집중적으로 하는 것도 없고, 약간의 방황을 하는 쥐라 그럴까, 이렇게 책을 읽는데에 집중을 하는 것은 이것 또한 삶에 있어서 <경박한> 것에 대하여 <진지하게> 대하는 것이 아닐까?
책을 읽는 다는 행동이 경박한 것은 아니지만, 지금 다른 해야할 일이 더 많을 터일 텐데, 이러고 있으니


p.68

고양이는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는 다만 자유를 좋아할 뿐이다.



p.84

낯선 도시에서 비밀 스러운 삶을 살고 싶어하는 내 꿈 이야기로 되돌아와 보자. 내가 이러이러한 사람임을 드러내보이지 않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낯선 사람들과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경우에라도

나는 실제보다 더 보잘 것 없는 사람으로 보였으면 싶다. 예를 들어서 실제로 어떤 나라를 가보아서 알고 있다 하더라도 나는 모르는 척하고 싶다. 내게는 익숙한 어떤 사상을 누가 장황하게 이야기한다면 나는 그런 것을 처음 듣는 것처럼 하고 싶다. 누가 나늬 사회적 지위를 묻는 다면 나는 지위를 낮추어 대답하고 싶다.  ... 유식하게 떠드는 사람의 말은 듣기만 할 뿐 이의를 말하지 않았으면 싶다. 나는 <격>이 낮은 사람들과 왕래하고 싶다. 이런 각도에서 본다면 파리는 모든 대도시들이나 마찬가지로 귀중한 곳이다.


p.90 

달은 우리에게 늘 똑같은 한 쪽만 보여준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의 삶 또한 그러하다. 그들의 삶의 가려진 쪽에 대해서 우리는 짐작으로밖에 알지 못하는데 정작 단 하나 중요한 것은 그쪽이다.





p.166

언제나 손에 잡으려면 벗어나는 것이 그 본질인 현재가 아주 예외적으로 마치 기름에 의해서 잔물결로 변하는 파도처럼 질펀해져 버릴 수는 없을 것인가?

나는 오히려 무가 되고 싶었다.

그저 나 자신을 잊어버리고 싶었다는 뜻으로 이해하라.
Entendara(?) como todavi'a yo quiero olvidarme. ???



p.168

그러나 그날, 얼마나 엄청난 정적이었던가! 나는 그 단조롭게 퍼덕이는 소리에 주의를 기울이며 마치 자기의 수단을 상실한 비행사가 자기에게 오는 음파만을 믿듯이 그 소리에 인도되어갔다.(19c에 태어난 사람 맞나?) 그냥 그렇게 걸어만 갔다. 그러니까 그것은 내가 조금 전에 말했듯이 어떤 무(無)를 향한 걸음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나는 나를 잡아주고 있는 어떤 줄을 따라가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장밋빛과 흰빛의 바둑판 무늬 같은(띄어쓰네?) 아랍인들 마을, 내 주위에 닫혀 있는 집들의 푸른빛 정면, 상자 갑같이 반듯반듯한 유럽 사람의 집들, 내 발 밑에 펼쳐진 중학교의 직사각형 교사들, 팔처럼 곡선을 그리는 해군청, 군데군데 쪽 빛으로 짙어지는 푸른 바다가 나를 저희들의 존재에 참여시켜주고 있었고 

그 존재가 내겐 착각처럼 느껴지기는 했지만 결국 나 자신의 존재보다 더 착각도 덜 착각도 아닌 것이어서, 우리는 나나 저희들이나 한결같이 아무런 의지할 버팀대도 없지만 서로서로를 지탱해주고, 매순간 우리들의 상처를 통해서 우리 자신의 삶이 새어나가도 속수무책이지만 서로의 피를 주고받으면서 그것 자체로 놓고 보면 존재하지도 않는 것을 존재하게 만드는 절대적 통일l'Unite'을 은밀하게 실감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p.173

가장 먼 곳에 대한 사랑을...... .

- 차라투스트라

 

북쪽의 어느 낯선 고장으로 자리를 옮기고 보니 내게는 삶이 무겁고 시가 없어 보였다.
시가 없다는 말은 더할 수 없이 단조롭기만 한 것에서 매순간 새로운 면을 발견하게 만드는 그 뜻하지 않은 놀라움이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나는 새롭게 여겨지는 것에서 단조롭기만 한 면을 발견해 가는 중이었으니 ... ... .

 

p.175

여행을 해서 무엇하겠는가? 산을 넘으면 또 산이요 들을 지나면 또 들이요 사막을 건너면 또 사막이다. 결국 절대로 끝이 없을 터이고 나는 끝내 나의 둘시네를 찾지 못하고 말 것이다. 그러니 누군가 말했듯이 이 짤막한 공간 속에 긴 희망을 가두어두자.

그럼 무엇을?

태양과 바다와 꽃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나 나에게는 보로메 섬들이 될 것 같다.

마른 돌담 하나 - 나를 격리시켜 주이게 족할 것이고 - 어느 농가의 문턱에 선 두 그루의 시프레 나무 - 나를 반겨 맞아주기에 족할 것이니 

한 번의 악수, 어떤 총명의 표시, 어떤 눈길 이런 것들이 그르니에의 보로메 섬일 터이다.

그렇다면 나의 보로메 섬은 무엇일까?

문득 일단 먼저 떠오른 것은 나의 중2~재수 때 함께한 그 길, 어느 여고 앞의 길다란 직선 도로 소위 내 어느 친구와는 그 길을 실크로드라 불렀던, 그 실크로드가 내게 나의 보로메 섬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 길은 4시 4철이면 그 모습을 달리한다. 아직도 커다란 가로수들이 그 양 옆을 자리메꿈하고 있어서 그 길을 잘 밝혀준다. 지금 사실 잘 기억이 안 난다. 그 양 옆의 나무들이 그 도로의 것인지 아니면, 한쪽은 그 모 여고의 담벼락 안의 것 그리고 반대편 쪽의 나무는 그 아파트단지 담벽 내의 나무들 인건지,,,

여튼 어느 것이든 -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 그 길은 한쪽편 끝에서 다른 쪽편 끝을 바라보게 될 때 그리고 어떤 햇살과 얌전한 바람을 함께하게 될 때, 너무도 고요하고 아름다움을 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단점이 있다면, 자동차들이 너무 많이 다녀서, 그 고요를 오랫동안 느끼다가도 때론 자동차의 방해를 받을 수 있다. 하지만, 괜찮다. 자동차의 방해도, 큰 틀에서의 고요함을 깨뜨리지는 못하니까..

군대에서의 야간 행군할 때, 산 속의 아스팔트 도로를 걸으면서 들리는 나무에 바람이 부데끼는 소리들, 너무 고요하기 그지없고, 좋다. 너무나 좋다. 그 소리, 그 느낌, 그 공기의 감촉.

 

나의 보로메 섬. 이것은 물리적인 것들 중 하나의 예시였고, 추상적이거나 비 물질적인 것들 중의 하나는,,, 생각을 해보자.

바로 사랑하는 사람과의 eye contact가 될 것 같다. eye contact. 눈 마주침. 이 보다 더 좋은 것은 있을까? 딱히 뭐라 할 말은 없지만, 서로 보고만 있어도 무언가 통하는 그 느낌, 씨익 서로의 미소를 주고받는 그 느낌. 그것이 또다른 나의 보로메 섬이 될 수 있을 것만 같다. 될 수 있을 것 같다.,,,, 나의 보로메 섬. 나의 보로메 섬.

오 나의 보로메 섬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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